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 운동이다. 경상북도의 신교육운동을 이끌어 왔던 대구광문사가 선화당(경상북도 관찰부의 정청) 정문 앞의 공공 건물에 있던 회관을 1906년 1월 경북의 관찰사 서리가 된 박중양으로 부터 회수당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일제가 선화당에 일장기를 내걸고 대구이사청 개정 준비에 한참일때 대구광문사 회원들은 대한제국은 있으되 국권이 없는 망국 현실을 통탄하면서 대책을 숙의한 결과 이사청에 맞서는 자치단체인 대구민의소를 1905년 8월에 조직하게 되었다.
김광제, 서상돈 등 대구광문회 회원들은 단연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를 대구국채 담보회라 칭하고 서문 밖 달서교 부근에 있던 수창사(지금의 수창 초등학교)에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 했다. 이어 국채보상을 위한 첫 대구군민대회를 1907년 2월 21일 대구성 밖 북후저어 아래에서 개최하고 발의시 작성된 취지서를 낭독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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