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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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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읍성과 북성로
등록일 : 2023-12-09 12:49조회수 : 586작성자 :


대구읍성의 성벽은 지금의 대구 시가지 중심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분성로 거리를 잇는 구간을 따라 서 있었다.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전체 둘레는 2,700m, 높이는 5m에 달했다. 읍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진동문(鎭東門) · 달서문(達西門) ·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 · 공북문의 4대문(大門)과, 그보다 조금 작은 동 · 서 2소문(小門)까지 여섯 개의 성문과 성의 모퉁이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 4개의 망루가 있었다. 백성들은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한 4대문 대신 동 · 서의 두 소문을 주로 이용하였다. 읍성 안으로 북동쪽에는 경상도 전체의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지였던 경상감영이, 북서쪽에는 관리들이 머물던 객사(客舍) 달성관(達城館)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부의 관청들이 즐비하였다. 읍성의 남서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달서문과 진동문 밖에서는 큰 시장이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조선 후기에 한양,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명성이 높았던 시장이었다.


달성관 앞마당에서는 매년 2월에 대구에서 약령시가 열릴 때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인들이 찾아오는 큰 장이 열렸는데, 이미 장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사람과 말이 몰려들기 시작해 읍성의 북문부터 남문에 이르는 길가마다, 성안에서 서문에 이르는 길가마다 집집마다 상점이 열리고, 작은 공터에까지 노점이 세워졌다. 수백 마리의 말과 수만 명의 상인이 최소 한 달을 대구에 머물렀고, 비단 약재상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여각이나 주막, 그 밖의 많은 상점들이 호황을 누렸던 당시의 대구에서는 “대구 상인들은 약령시 열리는 한 달 동안 벌어서 1년을 편안히 놀고 먹는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북성로는 1907년 성이 허물어지면서 북쪽에 생긴 신작로를 말합니다.


당시 대구읍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파괴되는 소리가 천지를 울리고 곡괭이질 한 번에 남자들이 울고 그 울음소리에 아녀자도 뛰어나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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